사건과 인물

6.25전쟁

 
작성일 : 12-09-15 16:53
나라를 구한 낙동강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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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관리자
 
나라를 구한 낙동강 전투
낙동강 혈전이 특별한 네 가지 이유
 
6.25전쟁 당시 고지를 점령하고 만세를 부르는 국군의 모습
 
‘낙동강전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 전투다.’
 
6ㆍ25 전쟁 당시의 수많은 전투 중에 ‘왜 낙동강전투가 특별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전문가들이 내놓은 이구동성의 대답이다. 낙동강전투는 국지적인 승리, 전술적인 승리가 아니라 전쟁의 흐름을 바꾼 전투였으며, 나아가 국가의 운명을 가른 전투였다는 이야기다.
 
1. 국가의 운명을 좌우
김일성은 무슨 일이 있어도 1950년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북한군을 독촉했다. 일본으로부터 우리 민족이 해방된 지 5주년이 되는 상징적인 날에 전 한반도를 공산화시키겠다는 생각이었다. 낙동강전투 직전까지의 상황은 모든 것이 김일성의 뜻대로 되는 것처럼 보였다.
국군은 개전 초 춘천에서 적 2군단의 공격을 다소 늦추고, 동락리ㆍ화령장 등에서 국지적인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1950년 8월까지 서울ㆍ수원ㆍ대전 등 주요 도시를 잇따라 적의 손에 내주었다. 국군은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에 제대로 대응태세를 갖출 수 없었다.  
 
믿었던 미군이 7월 초부터 참전했지만,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던 점은 더욱 충격이었다. 낙동강전투 당시 북한군은 38선 이남 지역의 90%를 이미 장악한 상태였다. 돌려 말하면 낙동강전투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겨우 10%의 영토만 남은 백척간두의 위기였다.
전쟁사 전문가인 육군대학 전쟁사학처장 이덕윤 대령은 “만약 낙동강전투에서 패전한다면 일개 전투의 승패 문제가 아니라 그대로 대한민국이 멸망당하는 상황을 의미했다”며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하려는 김일성의 음모를 분쇄한 전투, 대한민국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원한 운명적인 결전이 바로 낙동강전투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2. 자신감을 심은 전투
지난 2010년 한글로 번역돼 공개된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비망록(Confidential Note) 중에서 1950년 8월 16일자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등장한다. 낙동강전투가 한창이던 그날 이 대통령이 모젤 권총을 손에 쥐고 흔들며 무초 주한 미 대사에게 화를 냈다는 것.
왜 일국의 대통령이 대사에게 권총을 꺼내들고 화를 냈을까. 그 이유는 다름아닌 미국의 망명정부 계획 때문이었다. 낙동강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미국 정부 일각에서는 패배에 대비해 대한민국 정부 소재지를 제주도로 옮길 생각을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본토를 포기하고 섬으로 들어가는 것은 1949년 대륙을 포기하고 대만 섬으로 들어간 중국 국민당 정부와 비슷한 운명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비망록에 따르면 무초 대사의 정부 제주 이전 제안을 사실상의 망명정부 계획으로 받아들인 이 대통령은 결국 무초 대사 앞에서 권총을 꺼내들고 정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
실제로 미국이 제주도 혹은 서사모아 등 태평양 도서지역에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계획(New Korea Plan)을 검토한 일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도 승리의 확신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대한민국이 일개 망명정부로 전락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승리한 것이 바로 낙동강전투다.
이제 더 이상 무력하게 후퇴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은 전투. 그것이 바로 낙동강전투의 또다른 가치인 것이다. 낙동강에서 버티면서 인천상륙전으로 전세 역전에 성공한 것도 그런 승리에의 자신감, 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육대의 이덕윤 대령은 “우리 국민들에게 처음으로 승리에의 자신감을 심어준 전투였다는 점에서 6ㆍ25 전쟁 전체의 흐름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3. 어깨를 나란히 한 한·미군
낙동강전투의 또다른 의의는 한미군이 최초로 체계적인 연합전선을 형성해 방어작전을 실시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군의 수준은 개전 직전까지 공비토벌작전의 소부대 전투경험은 있었을 뿐 75% 이상의 부대가 대대 및 연대의 전술훈련이 종료되지 않은 채 전투에 임했다. 사단급 이상의 대부대 전술에는 숙달되지 않은 상태였다는 뜻이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부에 위임했다. 당시 병력과 장비, 교육훈련 수준이 열세였던 한국군의 상황으로 봐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처럼 지휘체계가 통일됐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한미 양국 군대가 긴밀하게 협조된 작전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낙동강전투 시점에 접어들면서 한국군과 미군은 서로 치밀하게 연계된 작전을 펼쳐 처음으로 연합작전의 위력을 서서히 발휘하기 시작했다.
화력과 기동력이 우수한 미군은 낙동강 연안의 개활지를, 상대적으로 산악전에서 더 잘 싸웠던 국군 수도ㆍ1ㆍ3ㆍ6ㆍ8사단 등 5개 사단은 대구 북방에서 포항까지의 산악지대를 맡아 방어했다. 또한 낙동강전투 때부터 미군부대에 한국군 전투요원을 지원하는 카투사(KATUSA) 제도를 도입, 한미 연합체제를 더욱 강하게 뒷받침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남정옥 박사는 “낙동강전투 기간 중 국군 1사단이 미국과의 연합작전 과정에서 믿음과 신뢰를 쌓은 것은 의미가 매우 크다”며 “연합작전은 신뢰를 바탕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인데, 그런 믿음이 형성된 계기가 바로 낙동강전투, 그중에서도 다부동전투였다”고 설명했다.
 
4. 민·관·군·경의 합력
낙동강전투의 또다른 가치는 민ㆍ관ㆍ군ㆍ경이 힘을 합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낙동강전투에서 무기를 들 수 있는 학생들은 학도병 또는 학도의용군으로, 나이가 많아 그마저도 할 수 없지만 전쟁에 참여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노무자로 근무했다.
7월 27일 대한 학도의용대가 육본의 승인하에 대구에서 “죽음으로 나라와 겨레를 지킬 것을 선서한다”라는 출전선서를 해 실제로 전선에서 활약했다.
낙동강전투 중 1사단과 3사단에서의 학도병 활약은 유명하다. 특히 3사단의 포항전투에서 학도병이 북한군과 단독전투를 벌였던 유명한 일화는 몇년 전 내용을 각색해 영화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감동적인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는 데는 군과 경찰의 구별이 있을 수 없었다. 전체 낙동강 방어 전투에 약 1만5000명의 경찰이 참전했다. 대구 다부동전적기념관에는 경찰 전사자 추모비도 별도로 서 있다.
 
노무자의 공도 잊을 수 없다. 낙동강전투가 한창이던 8월 17일 유학산에서 방어 중이던 국군 1사단 12연대 병력들은 보급이 추진되지 않아 굶고 있었다. 대대에서는 노무자 150여 명을 동원해 고지 중턱으로 보급품을 추진하는데 노무자들의 흰 옷은 적에게 표적으로 노출돼 10여 명이 희생되고 말았다.
그중에 40~50대 농촌 출신의 노무자들은 “젊은 우리 애들이 산에서 굶어가며 피를 흘리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습니까”라며 60~70㎏이나 되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산비탈을 5~6시간 걸어서 식량과 탄약을 보급했다. 이 때문에 당시 대대장이었던 한순화 소령은 “유학산 전투의 절반은 노무자들이 수행했다”고 회고할 정도다.
육대의 이덕윤 대령은 “낙동강전투의 승리는 이처럼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거둬낸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값진 성과”라고 강조했다.

(국방일보 2011. 9. 27일자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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